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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교육
민족교육의 체계
민족교육의 내용
2003년도부터 적용된 새 교과서
학생들의 생활
교육권옹호와 학교운영
민족교육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길에서
과목별수업시간수
민족교육 주요년표
민족교육 ― 민족교육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길에서

총련과 재일동포들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옳바른 령도와 조국의 따사로운 사랑과 배려 밑에 온갖 난관을 이겨내며 민족교육사업올 발전시켜왔다.

초창기
8.15해방을 한없는 감격과 가쁨으로 맞이한 재일동포들은 다시는 식민지노예생활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굳센 결심밑에 우리 말과 글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하여 떨쳐나섰다. 동포들은 자기 자녀들을 새 조국 건설의 역군으로 키우려는 념원을 안고 8.15 해방직후 도꾜 도쯔가 국어강습소를 비롯하여 동포사는 곳마다에 국어강습소를 내왔다. 이렇게 시작된 민족교육은 조련결성후 더욱 조직적으르 발전되여갔다. 조련은 1946년 4월부터 일본 도처에 생긴 국어강습소들을 초, 중, 상의 3년제 초등학원으로 개편하여 초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후 같은 해 9월에 그것을 다시 통합정비하여 6년제의 정규학교로 발전시켰다. 이와 함께 조련의 주도밑에 1946년 10월 도꾜조선중학교를 창립한것을 계기로 중등교육도 실시하였다. 교육일군들은 1946년 2월에 교재편찬위원회를 무어 1948년 4월까지만 하여도 92점, 100만부의 교과서와 부교재들도 자체 힘으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해방직후부터 1946년 10월까지에 일본각지에 525교의 초등학원, 4교의 중학교, 10교의 청년학교를 설치하였으며 1천100여명의 교원들로  4만1천여명의 학생들에게 체계적인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4.24교육투쟁
조선침략을 노리던 미제는 자주독립국가수립을 위한 재일동포들의 애국투쟁과 민주주의적민족교육을 압살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였다. 1948년 1월 미제는 일본당국을 시켜 조련이 자주적으로 실시하고있던 민족교육을 부인하고 우리 학교를 페쇄하려는 의도를 담은 《통고》를 전국의 도도부현 지사들에게 하달케 하였다. 조련에 굳게 뭉친 재일동포들은《조선학교를 목숨으로 지키자 ! 》는 구호밑에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를 뭇고 다음 4개의 요구조건올 내걸어 투쟁하였다.
  1. 교육용어는 조선어로 한다.
  2. 교과서는 조선인교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것을 사용한다.
  3. 학교의 경영관리는 학교단위로 조직된 학교관리조합에서 한다.
  4. 일본어는 정과로 가르친다.
당시 미제와 일본당국은 이 정당한 요구를 들고 학교를 지키는 투쟁에 떨쳐나선 동포들을 류혈적으로 탄압하였다. 특히 효고에서는 4월 24일과 25일에 미점령군이 《비상사태선언》까지 공포하여 야수적인 탄압을 감행하였으며 4월 26일에는 일본경찰대가 오사까부청앞에 모여든 2만여명의 동포들을 무력으로 탄압하였다.투쟁과정에 김태일소년(당시 16살)이 총에 맞아 희생되였다. 재일동포들이 견결히 투쟁한 결과 1948년 5월 5일 일본당국은 우리 교육대책위원회의 4개의 요구조건을 인정하는 각서를 교환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끝내 우리 민족교육을 말살하려는 미제와 일본당국은 조련을 해산시킨 직후인 1949년 10월에 《조선인학교페쇄령》을 내렸다. 재일동포들은 그러한 곤난한 조건을 박차고 우리 교육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였으며 자주학교, 공립학교, 민족학급 등 여러가지 형태로 민족교육을 계속 실시하였다.
교육체계의 완비
 총련의 결성은 민주주의적민족교육의 발전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총련은 결성된 첫날부터 재일동포들과 함께 민족교육사업에서 주체를 확고히 세우며 그를 강화발전시키기 위하여 온갖 힘을 기울였다.
 총련은 중앙과 각 지방본부에 교육전문부서를 설치하고 민족교육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조치들을 연거퍼 취하였으며 특히 재일동포들과 힘을 합쳐 학교들을 모두 자주학교로 만들고 대학교를 내오기위한 사업에 모든 힘을 다하였다.결과 학교들의 자주화가 실현되고 1956년 4월 10일에는 해외교포들의 첫 최고학당인 조선대학교가 창립되였다.
 이리하여 초급학교로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정연한 민주주의민족교육체계가 갖추어졌으며 재일동포들의 고등교육에 대한 숙원을 풀수 있게 하였다.
 특히 주석님께서 1957년에 나라의 형편이 매우 어려운 속에서도 막대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신것은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 획기적인 계기로 되였다.
새로운 비약에로
1959년 12월 조국에로의 귀국의 배길이 열린후로부터 총련사업과 더불어 민족교육사업에서는 일찌기 없었던 앙양이 이룩되였다. 학생수가 급속히 늘어남에 따라 학교건설사업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단 4년동안에 76교에서 진행되였다. 1965년 6월에 《한일조약》이 체결된것을 계기로 일본당국의 민족교육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이 다시 감행되였다. 그러나 재일동포들은 총련의 주도밑에 단결된 힘으로 투쟁하여 《외국인학교법안》을 7번이나 페안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1968년 4월 17일에 조선대학교가 학교법인 인가를 획득한것은 재일동포들의 민주주의적민족교육을 옹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이룩한 커다란 승리였다. 그후 투쟁을 계속하여 1975년 1월에 상잉조선초중급학교(당시)가 인가를 받음으로써 모든 학교들이 학교법인 인가를 쟁취하여 민족교육의 합법성을 공고히 하였다. 각급학교들에서는 1977학년도, 1983학년도, 1993학년도, 2003학년도의 4번에 걸쳐 과정안과 교과서를 개편함으로써 새로운 환경에 맞게 각급 학교 교육사업을 보다 높은 수준에서 발전시켰다. 오늘 민족교육은 60년동안에 이룩한 업적과 성과, 그리고 그 정당성과 생활력으로 하여 일본인민을 비롯한 세계 광범한 인민들속에서 적극적인 지지성원을 받고있다.
옳바른 교육관
교육은 자녀들의 미래를 키우고 장래를 책임지는 사업이다.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베푸는 수많은 혜택속에서 가장 귀중한것은 참된 삶의 길을 잡혀주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것은 자녀들을 어떤 학교에 보내여 어떤 교육을 시키는가 하는 문제일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태도여하에 따라 자녀들은 판이한 두가지 길을 걷게 된다. 다시말하여 참다운 조선사람으로 자라나는가 아니면 자기민족도 모르고 《동화》의 함정에 빠진 사람으로 되고마는가 하는 두가지 길이다. 일본에서 나서자라 조국과 고향도 모르는 새 세대일수록 민족교육이 더 간절히 요구된다. 결국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 자기자식에게 민족교육을 시키는가, 일본교육만을 받게하는가 하는 선택문제는 학부모자신이 어떻게 살아나가겠는가 하는 문제, 삶에 대한 기본자세에 관한 문제로 귀착된다.